제가 읽은 독법과 오늘자 논의 비평은 공통점이라곤 없다시피 합니다. 전혀 달러요. 비평이 왜 당당한 하나의 장르일 수 있는지 여실히 알겠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작가, 욘 포세의 작품에 머무르는 시간의 폭 그리고 단지 한 점으로 몰아가는 환원(줄거리나 교훈)이 아니라 정성을 다한다고 할 지, 해질녘에도 생생한 놀이터 아이들처럼 놀랍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요? 타자는 소란스러운 침입자 아니면 매혹적인 경탄의 대상일 뿐이었고 그리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고도 이내 어느 한 쪽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전자와는 늘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거나 피해 다니기 바빴고, 후자는 우리가 기적을 떠들 수 없는 것처럼.
누군가를 평하는 줄 알지만 기실 그 평이야말로 화자의 맨얼굴을 고발합니다. 투영이라도 하듯 자신과 닮은 점들만 구분할 수 있어요. 표면적인 인상을 즉시 단정해 버리는 소문이나 뒷담화가 이 단계에 속한다면,
충분히 시간을 들여 공력을 쌓은 뒤에야, 아니면 대상을 그 자체로 바라볼 수 있는 가난한 마음을 지녀야만 비로소 비평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아직 열어본 적 없어요. 열린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조각난 편린에 매달려 직접 겪었던 일들만 복기할 수 있었나 봅니다.
비평이 반드시 비평가를 은폐하진 않습니다. 자신이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든 괘념치 않아서 인위적으로 분리시킬 수 없을 뿐입니다. 둘은 태아처럼 붙어있는 게 아니고 사랑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이 이상은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껏 알던 바와 별 상관이 없었다고 말해도 무방할 만큼 두꺼워요.
제가 읽은 독법과 오늘자 논의 비평은 공통점이라곤 없다시피 합니다. 전혀 달러요. 비평이 왜 당당한 하나의 장르일 수 있는지 여실히 알겠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작가, 욘 포세의 작품에 머무르는 시간의 폭 그리고 단지 한 점으로 몰아가는 환원(줄거리나 교훈)이 아니라 정성을 다한다고 할 지, 해질녘에도 생생한 놀이터 아이들처럼 놀랍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요? 타자는 소란스러운 침입자 아니면 매혹적인 경탄의 대상일 뿐이었고 그리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고도 이내 어느 한 쪽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전자와는 늘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거나 피해 다니기 바빴고, 후자는 우리가 기적을 떠들 수 없는 것처럼.
누군가를 평하는 줄 알지만 기실 그 평이야말로 화자의 맨얼굴을 고발합니다. 투영이라도 하듯 자신과 닮은 점들만 구분할 수 있어요. 표면적인 인상을 즉시 단정해 버리는 소문이나 뒷담화가 이 단계에 속한다면,
충분히 시간을 들여 공력을 쌓은 뒤에야, 아니면 대상을 그 자체로 바라볼 수 있는 가난한 마음을 지녀야만 비로소 비평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아직 열어본 적 없어요. 열린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조각난 편린에 매달려 직접 겪었던 일들만 복기할 수 있었나 봅니다.
비평이 반드시 비평가를 은폐하진 않습니다. 자신이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든 괘념치 않아서 인위적으로 분리시킬 수 없을 뿐입니다. 둘은 태아처럼 붙어있는 게 아니고 사랑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이 이상은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껏 알던 바와 별 상관이 없었다고 말해도 무방할 만큼 두꺼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