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바디우 [세기 Le Siècle] 발제문 (1장. 방법에 관한 물음) 1998.10.21
보통 세기를 백 년 단위로 상정하는데 각 세기의 특징을 서술한다는 것은 바꿔 말해서 다른 백 년을 잊게 할만큼 강력한 하나의 사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건을 주목하느냐에 따라 세기가 지정됩니다. 1. 공산주의 혁명이 시작되고 마감되는 양상을 중심으로 하는 소비에트적 세기(1914-1991) 2. 대량학살이 자행된 전체주의적 세기(1917-1976 마오의 죽음) 3. 자본주의와 세계시장이 승리한 세기(1970-현재, 즉1998)
세기는 객관적인 단위가 아니라 그 생산물을 통해 사유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치즘의 만행에만 주의를 집중하면 나치 당원들의 사유가 봉쇄됩니다. 이렇게 사유되지 않고 남겨지는 것들을 우리는 결코 파괴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저지른 만행이 회귀될 수 있어요. 그러므로 나치즘을 사유가 아니라 야만이라 칭하면서 감춰서는 안 되고 그 자체로 정치요 사유라고 주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조리하고 몰인정한 그 질서를 나치 당원들은 정성껏, 엄격한 규정과 더불어 사유했고 다뤘기 때문입니다.
나치즘적(스탈린주의적) 부조리를 ‘악’과 동일시하는 도덕적 등식은 취약합니다. 왜냐하면 오랜 기간 우리는 악을 비-존재와 동일시하는 사고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악이 존재한다면 신이 창조했어야 합니다. 신에게 무죄를 선고하려면 악의 존재는 부정당해야 하고요. 나치즘은 사유나 정치가 아니라고 확언하는 이들은 정치에 무죄를 선고하기 바랍니다. 이는 나치즘이라는 정치적 실재와 그들이 보기에 결백한 민주주의 사이에 존재하는 은폐된, 깊은 연결을 위장하기만을 원하는 것입니다.
세기의 역사적 진실 가운데 하나. 히틀러에 맞선 연합국들은 독일 팽창주의에 맞서 전쟁을 벌인 것이지 유태인 말살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르비아나 이라크를 폭격하는 것이 인도주의적이라고 자처하는 민주국가들은 통제하는 방법을 알고 있지만 수백만의 아프리카인들이 에이즈로 죽어나가는 일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결국 세기의 진정한 문제는 무엇일까요. “민주국가들“과 그들이타자Autre라고 지적하면서 자신들은 무관하다고 말하는 바로 그 야만 사이에 존재하는 연결입니다. 그리고 해체해야 할 것은 무죄 선고를 위한 이런 논증 과정입니다. 이것이 해체될 경우에만 사람들은 몇몇 진리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이러저러한 사람의 인격적 주체성이 아니라, 세기 자체의 주체성에 가장 가까운 것을 붙잡아야 합니다. 실재하는 단편들을 거부하며 실질적인 연산 작용을 결정하는 것은 (진리의)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세기를 객관적으로 주어진 것처럼 판단하지 않고 세기가 어떻게 주체화되었는지를 물을 것입니다. 이것은 세기 자신의 내적인 호출이며 자신의 범주로 파악하는 방법입니다. 특별히 중요한 자료는 당사자들이 세기의 의미를 묻는 텍스트들과 ‘세기’라는 단어를 주로 취하는 텍스트들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판단을 몇몇 문제의 해결로 대체하게 될 것입니다. 현대의 도덕적 인플레이션으로 말미암아 세기는 모든 면에서 판단되었고 선고되었습니다. 이러한 판단들은 법적/정치적/지적으로 별 볼일 없습니다. 그보다 우리는 사유하면서 사유 가능한-존재를 배치하도록 합시다. 차라리 몇몇 수수께끼 같은 일을 따로 떼어내어서 다루도록 합시다.
20세기의 이례적인 개막(1890-1914) 위대한 두 10년의 내용: 촉발과 단절의 경이로운 시대
1898 현대적 글쓰기를 표명한 [주사위 던지기] 발표 후 말라르메 죽음
1905 아인슈타인. 제한된 상대성 창안. 같은 해, 빛의 양자 이론 창안
1900 프로이트. [꿈의 해석] 출판
1908 쇤베르크. 빈에서 비음계 음악의 가능성을 세움
1902 레닌.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증언된 창조물로 근대적 정치를 창조
제임스와 콘래드의 소설들 출판.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본질적인 부분 완성. 조이스 [율리시스] 무르익음.
프레게로부터 시작된 수학화된 논리학. 그에 부수된 것들과 언어철학이 러셀, 힐베르트, 젊은 비트겐슈타인에 의해.
1912 피카소와 브라크가 회화의 논리를 뒤흔들다.
후설. 집요하게 현상학적 기술을 펼치다.
이 모든 것과 병행해서 푸앵카레, 힐베르트가 리만, 데데킨트, 칸토어의 계보를 이어 수학의 스타일 전체를 다시 세움.
영화가 발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멜리에스, 그리피스, 채플린 등장
그런데 바로 이 짧은 시기 이후에 영혼을 배제하고 인간을 재료로 사용하는 비극이 발생합니다. 이토록 이질적인 정신이 연속적으로 갖는 의미와 관련해서 수수께끼같은 일 또는 문제가 존재했습니다. 세기 초반의 문명화된 개막은 세계 대전과 그 이후 이어진 불확실하고 불투명하며 패배에 가까운 승리들과 과연 관계가 있을까요?
축복받은 시기는 동시에 유럽인의 식민지 정복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만약 이 사실을 상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문제를 풀 어떤 기회도 갖지 못할 것입니다. 노예제 폐지까지 근 3세기가 흘렀습니다. 그동안 아프리카는 자본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유럽의 부귀영화를 가능하게 하는 추악한 이면으로 전락했어요. 그리고 이 일은 오늘날에도 계속됩니다. 세계대전 속 증오에 찬 격분과 죽음에 대한 무관심은 비단 큰 전쟁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식민지로부터 비롯된 무엇이 존재합니다. 즉 식민지에서 인류의 차이에 대해 검토하던 수단이 끔찍하게 회귀된 것 같은 양상말입니다.
말로의 말처럼 우리의 세기는 정치가 비극이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금빛 개막 속에서 어떤 비극적 비전이 준비되었던 것일까요. 어느 순간부터 세기는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려는 관념에 사로잡혔습니다. 이것은 파시즘과 공산주의 사이를 순환합니다. 새로운 인간을 창조한다는 것은 옛 인간을 파괴해야 한다는 강요로 되돌아 와서 난폭하고 화해 불가능한 토론이 옛 인간에 대해 행해집니다. 그러나 계획이 너무나 근원적이라 인간 삶의 특이성은 고려되지 않고 단지 재료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마치 근대의 예술가들에게 음과 형태가 균형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재료로만 여겨지는 것과 유사합니다. 또 객관적 관념화를 박탈당한 형식 기호들이 수학을 어떤 기계화할 수 있는 완성 위에 투영하는 것과도 유사합니다. 새로운 인간 계획은 세기 초반이 보여준 과학적, 예술적, 성적 단절과 동일한 주체적 어조를 역사와 국가 질서 속에서 주장하는 단절과 세움의 계획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이 범주가 사라졌습니다. 그 누구도 더 이상 정치적으로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면에서 옛 인간을 보존하고 위험에 처한 모든 동물과 옥수수까지 보존할 것을 요구합니다. 실제로 인간의 특성을 바꾸는 일은 그 어떤 계획에도 대응하지 않고 인간은 이제 정치가 아니라 유전자 조작을 통해서 인간 종을 변경하려고 준비합니다. 유전학은 사유가 아니라 기술이기 때문에 재정에 따라 좌우되며 사물의 자동성 속에서 결국 일어나고야 말 것입니다. 과학은 문제를 가질 뿐 계획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가장 깊이 가진 것 속에서 인간을 바꾸기“는 잘못된 계획이었고 이제 과학적이거나 기술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어쨌든 해결책을 가진 문제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과학적 문제의 해결책을 안다는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 물음에는 계획이 필연적입니다. 정치적이며 숭고한. 웅장하면서도 격렬한 계획 말입니다. 그런데 계획이 없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할 지 말해 주는 것은 오직 이익뿐입니다.
세기는 인간인 것에 대한 근원적인 변화가 이루어지는 세기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계획의 질서로부터 이익이라는 자동성의 질서로 옮겨갈 것입니다. 계획이 많은 사람을 죽인 것처럼 자동성 또한 많은 사람을 죽이게 될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일에 대한 책임자를 명명할 수 없는 상태에서 사람 죽이는 일은 계속될 것입니다. 세기는 거대한 범죄를 유발하는 계기였습니다. 마치 주식회사가 익명인 것처럼 익명의 범죄가 명목상 범죄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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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2024-02-23 16:55
과제와 연관 없는 책입니다. 어제 프로이트의 글을 읽어서 배경이 될 만한 책을 고르다가 눈에 띄었어요. 발제는 어제와 비슷한 방법으로 했는데 단락이나 문장의 갯수는 꼭 하나로 제한하지 않았습니다. 강의안을 필기한 제자가 있어서 만들어졌대요. 국내에서도 '친일파'로 일컬어지는 극우 세력이 계속 살아 돌아오는 이유가 혹 저자가 지적한 부분(나치 당원들을 그저 비-인간으로 도덕적 판단을 내릴 뿐 나치즘을 사유하지 않아서) 때문일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윤석렬이 얼마나 무식하고 폭력적인지 드러내는 내용을 끝없이 변주할 뿐 개인으로선 형편 없는 사람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처신하는 이들의 구체적 이유나 그들의 조직이 유지되는 메커니즘은 아직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인간도 아니,라는 판단을 끝으로 마치 그들을 저 멀리 치우기만 하면(이런 작업이 타자화,인가 봅니다) 손쉽게 다시 진정한 민주주의가 회복되기라도 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더 나아 보이는) 인재를 아무리 정치권에 들여도 양 극단으로 나뉘어 정쟁으로 세금과 시간을 낭비하는 작태를 우리는 보고 또 봅니다.
다음으로, 유럽에서 벌어진 대량 살상을 아프리카 식민지 상황과 연관해서 분석하는 관점이 신선했어요. 역시 우리에게로 눈을 돌리면 똑같이 사람이 죽어도 사안에 따라 여론이 붙거나, 또는 붙지 않습니다. 갸우뚱해집니다. 우리 역사에서 유럽이 흑인들을 노예로 삼은 것처럼 인간을 타자화,한 경험은 그렇다면 무엇일까요?
마지막으로, 집단적인 살인은 아직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는 저자의 말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어떻게 반박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논외로 좋은 책입니다. 함께 생각해보자고 초대하고 어떻게 현재의 생각에 이르렀는지 그 방법까지 알려줍니다.
알랭 바디우 [세기 Le Siècle] 발제문 (1장. 방법에 관한 물음) 1998.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