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팅 없이 방송만 들으니 더 집중이 잘 되는 한편, 여러분들의 의견을 모르니 계속 한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오늘따라 교수님의 언성, 데시벨이 높아서 시종일관 쫄았습니다. 목소리를 높이시면 일단 움츠러들어요.
방송에서 다루는 기사나 특정인의 발언 vs 교수님의 해석이라는 구도에서 가장 큰 차이점은 임기응변 vs 일관성입니다. 왜 저런 표현이? 어색하다, 이상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로 넘기게 되는데 그 느낌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일관된 기준에 따라 자세히 풀어주십니다. 정치인이 임기응변으로 상황을 모면하려는 것은 의도가 훤합니다. 듣는이가 갸우뚱하면서도 그런대로 넘기는 이유도 그 의도를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 생각해봅시다. 발언하는 자나 반복적으로 듣고(만) 있는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정말 제대로 알고 있습니까?" 조금씩 움츠러들었던 마음에서 풀려나 생각해 봅니다. 문장의 앞뒤를 촘촘히 따져 보고 풀어 설명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어떤 힘이 있을지. '아뿔싸, 그동안 내질렀던 수없이 많은, 생각 없이 던졌던 말들을 같은 식으로 해석한다면? 지금 이 순간 먼지가 되어도 부끄러움은 사라지지 않을거야.
다시, 묻습니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말 똑바로 하라,고 호통치는 게 아닙니다. 분석하는 이유가 누군가를 호통치기 위해서도 아니고요. 차분히 앞뒤를 들여다봐야 얼마나 모순적인지, 즉흥적인지 드러나기 때문에 마치 잔가시를 발라내듯 유쾌할 리 없는 그 작업을 진행하는 겁니다. 그 작업을 왜 게다가 방송으로 전파하는 걸까요. 다시 잠겨드는 생각...사회적 파급력이 없어서 그렇지 그때 그때 하루살이처럼 임기응변으로 살아온 것은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한동훈과 동일시하는 건 아닙니다. 매우 싫어해요.) 되도록 개성껏, 좋아하는 일을 찾아 평생을 '투쟁'하며 일관되게 산 것처럼 말은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고, 제가 선택한 길이 어떤 결과에 이를지 전혀 알 수 없었고, 다 떠나서 그 자리에 제가 있어도 되는지 이른바 '존재 증명'만으로도 벅차서 주변에서 선호하는 능력을 중심으로 삼아 헤쳐왔는데 우연히 그 능력이 '똑똑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평가는 그저 외피, 내용 없는 그릇에 불과했습니다. 마치 되도 않는 논리로 되받아치는 한동훈식 짜증나는 어법을 비슷하게 칭송하는 것과 차이가 없어요. X세대의 특징과 매우 거리가 먼 사람을 단지 출생년도가 맞다는 이유로 꾸며주는 것과도 같습니다. 반면, 교수님의 말은 수단입니다. 하자고만 들면 어떤 상황이든, 누가 됐든 예리하게 모순을 짚을 수 있으시겠지만 평소에는 허허 또는 하하 유쾌하게 웃으실 때가 훨씬 많지요. 그 웃음이 전하는 밝은 온기에 끌려 많은 이들이 모여들고요. 그런 성품이라도 소리 높여 일갈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말도 안되는 거부권 행사, 특히 10.29 참사유족을 그저 돈이나 받고 떨어지라는 듯 모욕적으로 대우하는 처사는 눈감아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중의 효과를 갖는데 교수님이 선을 보였듯이 일상에 무수히 떠다니는 임기응변적인 발언들을 잘 따져보고 옥석을 가리라는 제안입니다. 이쯤 되니 메시지의 중량감에 눌려 메신저를 바라보게 됩니다. "교수님, 삶이 달라요. 생존에 급급해서 겨우 살아남은 사람은 그렇게 통합된 사고를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굵직한 사안같으면 온 신경을 집중해서 찬반을 결정할 수 있겠지만 매일 쏟아지는 그 수많은 뉴스들을 그렇게까지 살피는 건 불가능합니다. 일상에 누적된 수많은 폭력들에 둔감해져서 살아남은 건데 이제 와서 생존 기술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더불어 교수님은 도대체 어떤 삶을 사셨을까 궁금합니다. 어떤 삶을 살았으면 저런 강직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질문을 던졌지만, 답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네, 생존 기술 그거 버려야 합니다." 상황이 변했고 시대가 바뀌었고 무엇보다 겉으로 흘려 들었던 그 똑똑함을 제대로 벼리고 내용을 담고자 길을 나섰기 때문입니다. 학문적인 도야와 생활 속 다양한 커뮤니케이션을 온통 섞어서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그 안에 숨어 때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바꾸는 태도를 유지할 거면 말아요. 뭘 표현하겠다거나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설명 따위 다 필요 없어요.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겁니까? 그 시간들이 우리 사회에 어떤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나요? 이상입니다. 화면 너머 보이는 인상을 통해, 연신 잠겨들게 되는 고인 생각들을 뒤져가며 발견한 것입니다. 매번 느끼지만, 우와 완전 재밌다며 가볍게 나선 길인데 나아갈수록 쉽지 않아요. (저처럼 늦된) 해시민들은 껍질 안에서, 교수님은 밖에서 연신 부리를 쪼아요. 단지 겉으로 보이는 요소들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배치와 의미, 컨텍스트 안에서의 함의도 살펴보겠습니다. 끝없이 작동되는 구심력-에고가 발목을 잡아서 속도는 빠를 수 없겠지만 방향은 확실합니다. 이 글을 다 쓰도록 아직도 조금은 교수님이 무섭지만 적어도 해시민들에게, 우리 사회에 무엇을 원하실지는 짐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덧. “이성 혹은 우리가 이미 아는 모든 것의 추산ratio은 우리가 그 이상을 더 알게 되면 이전과 같지 않다.“ by 윌리엄 블레이크 : 멋진 말입니다. 여러 책들에서 많이 칭송된 시인이라는 것만 알아요. 이 작은 <블레이크 시선>을 다 읽는다고 해서 뭘 더 알 수는 없을 것 같고… 유독 눈에 들어오는 문장이나마.
채팅 없이 방송만 들으니 더 집중이 잘 되는 한편, 여러분들의 의견을 모르니 계속 한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오늘따라 교수님의 언성, 데시벨이 높아서 시종일관 쫄았습니다. 목소리를 높이시면 일단 움츠러들어요.
방송에서 다루는 기사나 특정인의 발언 vs 교수님의 해석이라는 구도에서 가장 큰 차이점은 임기응변 vs 일관성입니다. 왜 저런 표현이? 어색하다, 이상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로 넘기게 되는데 그 느낌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일관된 기준에 따라 자세히 풀어주십니다. 정치인이 임기응변으로 상황을 모면하려는 것은 의도가 훤합니다. 듣는이가 갸우뚱하면서도 그런대로 넘기는 이유도 그 의도를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 생각해봅시다. 발언하는 자나 반복적으로 듣고(만) 있는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정말 제대로 알고 있습니까?" 조금씩 움츠러들었던 마음에서 풀려나 생각해 봅니다. 문장의 앞뒤를 촘촘히 따져 보고 풀어 설명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어떤 힘이 있을지. '아뿔싸, 그동안 내질렀던 수없이 많은, 생각 없이 던졌던 말들을 같은 식으로 해석한다면? 지금 이 순간 먼지가 되어도 부끄러움은 사라지지 않을거야.
다시, 묻습니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말 똑바로 하라,고 호통치는 게 아닙니다. 분석하는 이유가 누군가를 호통치기 위해서도 아니고요. 차분히 앞뒤를 들여다봐야 얼마나 모순적인지, 즉흥적인지 드러나기 때문에 마치 잔가시를 발라내듯 유쾌할 리 없는 그 작업을 진행하는 겁니다. 그 작업을 왜 게다가 방송으로 전파하는 걸까요. 다시 잠겨드는 생각...사회적 파급력이 없어서 그렇지 그때 그때 하루살이처럼 임기응변으로 살아온 것은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한동훈과 동일시하는 건 아닙니다. 매우 싫어해요.) 되도록 개성껏, 좋아하는 일을 찾아 평생을 '투쟁'하며 일관되게 산 것처럼 말은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고, 제가 선택한 길이 어떤 결과에 이를지 전혀 알 수 없었고, 다 떠나서 그 자리에 제가 있어도 되는지 이른바 '존재 증명'만으로도 벅차서 주변에서 선호하는 능력을 중심으로 삼아 헤쳐왔는데 우연히 그 능력이 '똑똑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평가는 그저 외피, 내용 없는 그릇에 불과했습니다. 마치 되도 않는 논리로 되받아치는 한동훈식 짜증나는 어법을 비슷하게 칭송하는 것과 차이가 없어요. X세대의 특징과 매우 거리가 먼 사람을 단지 출생년도가 맞다는 이유로 꾸며주는 것과도 같습니다. 반면, 교수님의 말은 수단입니다. 하자고만 들면 어떤 상황이든, 누가 됐든 예리하게 모순을 짚을 수 있으시겠지만 평소에는 허허 또는 하하 유쾌하게 웃으실 때가 훨씬 많지요. 그 웃음이 전하는 밝은 온기에 끌려 많은 이들이 모여들고요. 그런 성품이라도 소리 높여 일갈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말도 안되는 거부권 행사, 특히 10.29 참사유족을 그저 돈이나 받고 떨어지라는 듯 모욕적으로 대우하는 처사는 눈감아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중의 효과를 갖는데 교수님이 선을 보였듯이 일상에 무수히 떠다니는 임기응변적인 발언들을 잘 따져보고 옥석을 가리라는 제안입니다. 이쯤 되니 메시지의 중량감에 눌려 메신저를 바라보게 됩니다. "교수님, 삶이 달라요. 생존에 급급해서 겨우 살아남은 사람은 그렇게 통합된 사고를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굵직한 사안같으면 온 신경을 집중해서 찬반을 결정할 수 있겠지만 매일 쏟아지는 그 수많은 뉴스들을 그렇게까지 살피는 건 불가능합니다. 일상에 누적된 수많은 폭력들에 둔감해져서 살아남은 건데 이제 와서 생존 기술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더불어 교수님은 도대체 어떤 삶을 사셨을까 궁금합니다. 어떤 삶을 살았으면 저런 강직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질문을 던졌지만, 답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네, 생존 기술 그거 버려야 합니다." 상황이 변했고 시대가 바뀌었고 무엇보다 겉으로 흘려 들었던 그 똑똑함을 제대로 벼리고 내용을 담고자 길을 나섰기 때문입니다. 학문적인 도야와 생활 속 다양한 커뮤니케이션을 온통 섞어서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그 안에 숨어 때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바꾸는 태도를 유지할 거면 말아요. 뭘 표현하겠다거나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설명 따위 다 필요 없어요.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겁니까? 그 시간들이 우리 사회에 어떤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나요? 이상입니다. 화면 너머 보이는 인상을 통해, 연신 잠겨들게 되는 고인 생각들을 뒤져가며 발견한 것입니다. 매번 느끼지만, 우와 완전 재밌다며 가볍게 나선 길인데 나아갈수록 쉽지 않아요. (저처럼 늦된) 해시민들은 껍질 안에서, 교수님은 밖에서 연신 부리를 쪼아요. 단지 겉으로 보이는 요소들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배치와 의미, 컨텍스트 안에서의 함의도 살펴보겠습니다. 끝없이 작동되는 구심력-에고가 발목을 잡아서 속도는 빠를 수 없겠지만 방향은 확실합니다. 이 글을 다 쓰도록 아직도 조금은 교수님이 무섭지만 적어도 해시민들에게, 우리 사회에 무엇을 원하실지는 짐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덧. “이성 혹은 우리가 이미 아는 모든 것의 추산ratio은 우리가 그 이상을 더 알게 되면 이전과 같지 않다.“ by 윌리엄 블레이크 : 멋진 말입니다. 여러 책들에서 많이 칭송된 시인이라는 것만 알아요. 이 작은 <블레이크 시선>을 다 읽는다고 해서 뭘 더 알 수는 없을 것 같고… 유독 눈에 들어오는 문장이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