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주나 걸려 다 읽었습니다.
중간에 책 몇 번이나 집어 던지고 싶은 마음을 눌렀는지 모르겠습니다. 편지 형식으로 쉽게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저자와의 설명과는 달리, 저자가 책속에서 만난 등장인물들 혹은 동료들의 어록을 읽는 듯한 구성이 같은 말을 여러 번 듣는 듯하여 오히려 문맥이 한눈에 보이지 않아 다음장을 넘기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그래도 교수님께서 첫번째로 고르신 책이니 큰 계획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마음을 다잡고 끝까지 읽어냈습니다. (다음번엔 소설책을 선정하시길 마음속으론 투정아닌 투정을 하면서.......)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도 어느새 ‘읽은 정보와 거기 적용하는 분석과 통찰의 시간을 무시하고 보다 많은 지식을 보다 빠르게 얻고 새로운 모드로 넘어가기’에 얼마나 익숙해져 있었는지..몸소 체험하게 하는 것이 교수님의 큰 그림이었구나! 그 통찰력에 다시 한 번 탄복했습니다. (할렐루야!)
책을 읽으며 그동안 효율성을 내세워 얼마나 많은 글들을 흘려읽고 단순화 하고 버려버렸는지....그래서 안그래도 부족한 어휘와 문해력을 채울 방법을 못찾고 엉뚱하게 디지털 매체 탓으로만 핑계거리를 삼은 것은 아닌지에 대한 반성과 함께 해결을 열쇠를 본 듯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디지털 문화에서 우리는 컴퓨터가 우리처럼 될까 걱정하기보다 우리가 더 컴퓨터처럼 될지를 더 걱정해야 한다.”
뇌의 가소성과, 읽기 회로의 변화, 양손잡이 읽기 뇌와 같은 어려운 이론들을 돌고 돌아 도착한 곳에서 책 읽기가 주는 타인으로의 시선 옮기기, 추론, 공감, 통찰의 시간을 통해 인간 본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작가의 호소가 절절하게 들려왔습니다.
그동안 나는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속에 문자를 어떻게 처리하여 왔는가?
컴퓨터 화면으로 뉴스를 접하며 먼저 사진을 살펴보고 제목을 봅니다. 서서히 몇몇 키워드를 기준으로 스토리라인을 구성하고 글자를 빠르게 훑어 지나갑니다. 그 글자는 그림으로 들어와서 뇌 회로에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잘려 나갑니다.
새로 고침을 누르며 빠르게 새로 업데이트된 소식으로 넘어가며 똑 같은 읽기를 반복합니다.
몇 가지의 머리에 남은 단어들을 가지고 그 하루를 정의합니다.
우리가 읽은 정보와 거기 적용하는 분석 사이에서 커져가는 간극을 무시하고 보다 많은 지식을 보다 빠르게 얻는 새로운 모드로 넘어가기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우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다음에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 검토해야 합니다. (p299)
그동안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책을 읽으며 나의 이중적인 자아에 고민하고, 소외계층에 대한 사회의 폭력에 같이 분노하며, 울고 웃던 시간의 기억들을 잊고 살았습니다.
이 잊혀진 간접경험들이 타인에 대한 공감, 다름을 인정하는 배려와 인내심도 망각의 어둠속으로 끌고가고 비난과 혐오만을 남겼구나 하는 깨달음이 안타까웠습니다.
문자의 발명이 인류에게 끼친 가장 중요한 공헌은 비판적, 추론적 사고와 성찰 능력을 위한 민주적 기반을 마련한 것입니다. 이것은 집단적 양심의 기초입니다. 21세기에 우리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집단적 양심을 보존하려고 한다면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깊이 읽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개개인이 매체를 불문하고 비판적이고 현명하게 정보를 처리하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패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반성적 사유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20세기 사회 만큼이나 실패한 사회가 될 것이 확실합니다. (p298)
몇 년전 저널리즘 J 노무현과 언론개혁 편에 나와 눈물을 삼기시며 전해주신 유시민 작가님의 말씀이 떠오르며, 우리가 내재화한 지식이 없어 비판적인 사고도 할 수 없어 남에게 판단을 맡겼을 때 직시하게된 현실이 기억났습니다.

“저도 한때 누군가를 많이 원망했어요. 예전에는….

"각자가 좀 특히 언론과 관련해서는 기자분들은 기자분들 대로, 취재대상이 되는 정치인들은 정치인들 대로, 특히 정치보도와 관련해서는 언론 소비자 혹은 정보 수용자로서 시민들은 시민들 대로, 의심해보는 태도......'이게 다 사실은 아닐 수 있어' 혹은 '이게 다 사실이더라도 이 해석이 전적으로 옳은 것이 아닐지도 몰라'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면 저는 뭐..괜찮은 결과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소망 또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면 되게 충격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각자가 우리의 삶과 생각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면 괜찮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지금에 나는 저때의 나보다 흘러간 시간 만큼 사회를 통찰할 수 있는 지혜와 덕성을 지니고 있는가?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우리가 지닌 최고의 지적 능력과 공감 능력을, 덕성을 위한 능력과 결합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종이 지속되어온 비결임에 틀림없습니다. (p299)
스마트폰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세대를 키우는 엄마로서 아이가 청소년기에 접어든 요즘 항상 디지털 미디어의 접근을 막아야 하는가? 언제까지 막아야 하는가? 막는다면 앞으로의 변화에 도태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지니면서도, 디지털 매체에서 분리되는 것은 나 조차도 불가능해 졌음을 알기에 문명의 퇴화를 눈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방치하는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효율성을 내세워 가장 효율적인 소통의 매체를 가지고도 소통할 줄 모르는 아이러니를 소통의 수단인 매체의 문제가 아니라 소통의 주체인 우리의 공감과 통찰의 문제로 보니, 오히려 그동안의 답을 알 수 없었던 고민의 답을 얻을 수도 있겠다는 낙관이 생깁니다.
아이와 내가 잊고 있던 책을 읽었을 때 들렸던 고요의 전망대에서 ‘시종 유령’과 만나는 시간을 지켜가야지 하는 결심을 합니다. 그 곳에서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며, 현인이 깔아 둔 지혜의 길을 따라 내 맘 속을 탐험해보며 넘고 넘어야 할 산등성이 투성이의 세상이 아닌 너와 내가 손에 손을 잡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지닐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2주나 걸려 다 읽었습니다.
중간에 책 몇 번이나 집어 던지고 싶은 마음을 눌렀는지 모르겠습니다. 편지 형식으로 쉽게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저자와의 설명과는 달리, 저자가 책속에서 만난 등장인물들 혹은 동료들의 어록을 읽는 듯한 구성이 같은 말을 여러 번 듣는 듯하여 오히려 문맥이 한눈에 보이지 않아 다음장을 넘기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그래도 교수님께서 첫번째로 고르신 책이니 큰 계획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마음을 다잡고 끝까지 읽어냈습니다. (다음번엔 소설책을 선정하시길 마음속으론 투정아닌 투정을 하면서.......)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도 어느새 ‘읽은 정보와 거기 적용하는 분석과 통찰의 시간을 무시하고 보다 많은 지식을 보다 빠르게 얻고 새로운 모드로 넘어가기’에 얼마나 익숙해져 있었는지..몸소 체험하게 하는 것이 교수님의 큰 그림이었구나! 그 통찰력에 다시 한 번 탄복했습니다. (할렐루야!)
책을 읽으며 그동안 효율성을 내세워 얼마나 많은 글들을 흘려읽고 단순화 하고 버려버렸는지....그래서 안그래도 부족한 어휘와 문해력을 채울 방법을 못찾고 엉뚱하게 디지털 매체 탓으로만 핑계거리를 삼은 것은 아닌지에 대한 반성과 함께 해결을 열쇠를 본 듯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뇌의 가소성과, 읽기 회로의 변화, 양손잡이 읽기 뇌와 같은 어려운 이론들을 돌고 돌아 도착한 곳에서 책 읽기가 주는 타인으로의 시선 옮기기, 추론, 공감, 통찰의 시간을 통해 인간 본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작가의 호소가 절절하게 들려왔습니다.
그동안 나는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속에 문자를 어떻게 처리하여 왔는가?
컴퓨터 화면으로 뉴스를 접하며 먼저 사진을 살펴보고 제목을 봅니다. 서서히 몇몇 키워드를 기준으로 스토리라인을 구성하고 글자를 빠르게 훑어 지나갑니다. 그 글자는 그림으로 들어와서 뇌 회로에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잘려 나갑니다.
새로 고침을 누르며 빠르게 새로 업데이트된 소식으로 넘어가며 똑 같은 읽기를 반복합니다.
몇 가지의 머리에 남은 단어들을 가지고 그 하루를 정의합니다.
우리가 읽은 정보와 거기 적용하는 분석 사이에서 커져가는 간극을 무시하고 보다 많은 지식을 보다 빠르게 얻는 새로운 모드로 넘어가기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우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다음에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 검토해야 합니다. (p299)
그동안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책을 읽으며 나의 이중적인 자아에 고민하고, 소외계층에 대한 사회의 폭력에 같이 분노하며, 울고 웃던 시간의 기억들을 잊고 살았습니다.
이 잊혀진 간접경험들이 타인에 대한 공감, 다름을 인정하는 배려와 인내심도 망각의 어둠속으로 끌고가고 비난과 혐오만을 남겼구나 하는 깨달음이 안타까웠습니다.
문자의 발명이 인류에게 끼친 가장 중요한 공헌은 비판적, 추론적 사고와 성찰 능력을 위한 민주적 기반을 마련한 것입니다. 이것은 집단적 양심의 기초입니다. 21세기에 우리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집단적 양심을 보존하려고 한다면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깊이 읽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개개인이 매체를 불문하고 비판적이고 현명하게 정보를 처리하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패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반성적 사유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20세기 사회 만큼이나 실패한 사회가 될 것이 확실합니다. (p298)
몇 년전 저널리즘 J 노무현과 언론개혁 편에 나와 눈물을 삼기시며 전해주신 유시민 작가님의 말씀이 떠오르며, 우리가 내재화한 지식이 없어 비판적인 사고도 할 수 없어 남에게 판단을 맡겼을 때 직시하게된 현실이 기억났습니다.
“저도 한때 누군가를 많이 원망했어요. 예전에는….
"각자가 좀 특히 언론과 관련해서는 기자분들은 기자분들 대로, 취재대상이 되는 정치인들은 정치인들 대로, 특히 정치보도와 관련해서는 언론 소비자 혹은 정보 수용자로서 시민들은 시민들 대로, 의심해보는 태도......'이게 다 사실은 아닐 수 있어' 혹은 '이게 다 사실이더라도 이 해석이 전적으로 옳은 것이 아닐지도 몰라'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면 저는 뭐..괜찮은 결과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소망 또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면 되게 충격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각자가 우리의 삶과 생각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면 괜찮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지금에 나는 저때의 나보다 흘러간 시간 만큼 사회를 통찰할 수 있는 지혜와 덕성을 지니고 있는가?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우리가 지닌 최고의 지적 능력과 공감 능력을, 덕성을 위한 능력과 결합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종이 지속되어온 비결임에 틀림없습니다. (p299)
스마트폰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세대를 키우는 엄마로서 아이가 청소년기에 접어든 요즘 항상 디지털 미디어의 접근을 막아야 하는가? 언제까지 막아야 하는가? 막는다면 앞으로의 변화에 도태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지니면서도, 디지털 매체에서 분리되는 것은 나 조차도 불가능해 졌음을 알기에 문명의 퇴화를 눈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방치하는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효율성을 내세워 가장 효율적인 소통의 매체를 가지고도 소통할 줄 모르는 아이러니를 소통의 수단인 매체의 문제가 아니라 소통의 주체인 우리의 공감과 통찰의 문제로 보니, 오히려 그동안의 답을 알 수 없었던 고민의 답을 얻을 수도 있겠다는 낙관이 생깁니다.
아이와 내가 잊고 있던 책을 읽었을 때 들렸던 고요의 전망대에서 ‘시종 유령’과 만나는 시간을 지켜가야지 하는 결심을 합니다. 그 곳에서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며, 현인이 깔아 둔 지혜의 길을 따라 내 맘 속을 탐험해보며 넘고 넘어야 할 산등성이 투성이의 세상이 아닌 너와 내가 손에 손을 잡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지닐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