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의 인식 너머 어딘가 - 공감
저는 비행기를 타고 나가본 적이 아직까지 없지만, 외국에 가면 우리나라에서보다 장애인을 훨씬 많이 그리고 더 자주 마주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도움을 주는(시혜적 관점)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나와 대등한 너, 그리고 우리'로서,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대한다는 이야기도 종종 듣게 됩니다. 왜 그러할까 생각해 보다가 우연히 『장애시민 불복종』을 쓴 인권활동가인 변재원 작가의 글을 읽었습니다. 생각해 보자면 '장애인의 이동권'을 이야기하는 정도에서 그칠 것이 아니더군요. 아차 싶은 생각과 함께 조금 더 깊게 생각해보지 못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됩니다.
변재원 - 접근권과 자기 존중 (경향신문 오피니언, 2022.08.02.) 원문은 여기를 클릭
접근권의 시각에서 보면 장애인의 사회 참여 중 불공정함이 더 적나라하게 보인다. 최근 지하철 이동권 시위를 두고 ‘지구 끝까지 쫓아간다’는 서울경찰청장의 발표가 나오자, 장애인 활동가들이 쫓아올 것 없이 자진 출석하겠다고 경찰서에 간 적 있었다. 그들은 종로서, 용산서, 혜화서에 자진출석했지만, 모든 경찰서에 장애인이 접근 가능한 엘리베이터가 없거나 화장실 편의시설이 미비한 이유로 끝내 조사받지 못했다. 불법 장애인들을 엄벌에 처한다는 경찰의 발표가 무색하게도, 정작 경찰 역시 장애인의 접근권 보장 앞에서 관련 법을 지키지 못하는 현실이었다.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가 사법절차 진행 과정에서 공정한 수사를 받는 것은 중요한 시민의 권리임을 명시하며 ‘사법 접근권’을 별도로 규정하고 있을 정도인데, 유엔 장애인권리협약 비준국인 우리나라는 장애인의 공정한 사법 접근권을 실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상 속 접근권의 제약은 만연하다. 투표소 접근권의 제약으로 주권 행사를 포기한 장애인, 장애인 편의시설 면적 기준 제한으로 편의점이나 카페 출입을 단념한 장애인, IoT 연동 아파트 지능형 홈패드에 점자가 없어 아파트 문을 열거나 보일러를 조작할 수 없는 장애인, 편의시설 없는 무인 키오스크로 우동 하나 주문할 수 없는 장애인들이 여전하다. 제도적 접근권의 공백은 개인적 무기력감으로 이어졌다. 장애인들은 이 모든 예외적 상황을 마주할 때면 지나가는 타인의 옷소매를 붙잡고 ‘무례한’ 도움 요구를 감내해야만 했다.
여기서 또다른 글을 소개합니다. 일전에 하워드 진의 책 『달리는 열차 위에 중립은 없다』와 관련하여 소개한 민중의소리 이완배 기자의 또다른 기사입니다. 참고로, 아래의 기사와 팟캐스트 김용민브리핑에서 진행했던 <경제의 속살>의 내용을 토대로 쓴 기자의 책 『경제의 속살 (총4권)』도 일독을 권합니다. 비전공자에게도 매우 친절합니다. 경제학을 전공한 전 국회의원 유승민이 '따뜻한 보수'라는 말로 한때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요. '차디찬 주류경제학'을 지지하는 이가 '따뜻한 보수'라는 말을 하니 이러한 모순이 또 있나 싶었습니다. 이 네 권의 책은 주류경제학에 반기를 든 행동경제학을 필두로 '진정 따뜻한 경제학'이 무엇인지를 아주 쉽게 풀어내는데, 다 읽고 나면 '뜨거운 진보'가 말하는 경제학이 무엇인지 피부로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민중의소리 이완배 - [연재] 추석 연휴에 만나는 진보경제학자들의 꿈 ⑤ 공감은 길러지는 게 아니라 무뎌지는 것이다 _ 프란스 드 발 원문은 여기를 클릭
그렇다면 질문을 던져보자. 공감이라는 것은 후천적으로 길러지는 능력일까,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능력일까? 단언컨대 공감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본능이다. 말도 못 배웠고, 사회성에 대한 어떤 교육도 받지 못한 두, 세 살 아이가 아파의 아픔을 공감해야 한다는 사실을 누군가로부터 배웠을 리가 없다. 그 누구도 아이에게 “아빠가 아야 하면 가서 호~ 해줘야 해”라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이는 그렇게 한다. 이것이야말로 타인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공감 능력이 선천적 본능이라는 증거다.
주류 경제학은 오랫동안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이며, 적자생존(適者生存)이 인류의 법칙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인간과 가장 유사한 유전자(유전자 99% 이상이 일치)를 가졌다는 침팬지를 관찰한 드 발은 이런 주류 경제학의 전제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살아가면서 이 소중한 선천적 능력을 잃어버리는 대표적 동물이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분명 포유류에서 가장 진화한 동물이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시작된 이후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공감과 도덕 능력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
이 세상에서 살려면 남들의 아픔에 공감하지 말아야 한다. 침팬지가 보여준 도덕 따위도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굶어죽건, 병들어 죽건 상관치 않고 효율과 성장을 향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런 세상이 옳은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지 않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도록 태어난 인간으로부터 이 본성을 빼앗는 것은 너무 잔인하다.
변재원 작가와 이완배 기자의 글을 뒤섞어 생각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른 존재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이를 스스로에게 대입하여 생각하는 공감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어떠한 이유에서든 그 능력이 점점 사라질 수 있습니다. 이를 잊지 말고, 단순히 나보다 처지가 나쁜 이들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표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동등한 지위를 가지는 시민으로 더불어 살아감이 바람직하겠습니다. 개별 주체가 이러한 마음으로 타인을 대하는 것과 별개로, 공동체가, 사회가, 이 나라가 그러한 체계를 구축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누군가가 헌법이, 그리고 각종 법률이 보장하는 권리를 행사함에 있어 어떠한 이유로 '접근이 제한'된다면(여기에는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도 포함됩니다) 그 사람은 이 사회에서 존재가치를 잃어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나에게는 가능한 무언가가 불가능한(disabled) 누군가'를 '도와주는' 정도로 생각하는 것을 뛰어넘을 수 있겠느냐를 고민하는 것이 필요함에도, 그렇지 않은 자들이 현실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할 때 지독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제가 그렇지 않은 자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2. 생각의 타래 - 악, 게으름, 무식과 무지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은 '(그저 평범하게 보이는,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군중 속 일부에 불과한) 인간에게도 내면화된 악이 있을 것이다'는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였는데요. 제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평범함이 ordinary가 아니라 banality라는 것을 알고, 이건 또 뭔가 싶어 자료를 찾아보며 고민해 보니 지적 게으름이 가져온 부패 또는 타락에 가까운 의미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유의 깊이가 보잘 것 없기에 제가 잘못 이해했을지도 모르지만, 나의 앎에 의구심을 가지게 된 것만으로도 얻어가는 것이 있는 거라고 믿어보려 합니다. (네, 저는 아직 갈 길이 한참 멀어 보입니다.)
이 글을 쓰는 건, 해시칼리지 자유게시판에 있는 Eustochia님의 글을 보고 이준석과 그 패거리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원문은 여기를 클릭
장애인의 이동권에 관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집회·시위와 관련하여 이준석과 그 패거리는 '시민의 불편을 초래한다' 내지 '시위의 방식이 너무 진부하면서 과격하다'라는 이유를 내세워 혐오의 언어로 일방을 규정하고서는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게 할 요량으로 그들을 배제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서울시장 오세훈도 그 지분이 상당하겠습니다.)
이준석과 그 패거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는 있습니다. 사회 어디에나 일정 수준의 선을 넘는 자들은 으레 존재하기 마련이니까요. 다만 수면 위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인데. 여기에서 제가 앞서 언급한 '악의 평범성'이 '현상(phenomenon)'으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몇몇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더 많이 취하기 위해 또는 자신의 불편을 줄이기 위해* 이준석과 그 패거리의 주장을 깊은 사유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는 출퇴근길에서 집회·시위를 하는 장애인을 밀어냅니다. 면전에 대놓고 욕을 하기도 하지요. 당신들은 사회의 암적인 존재이니 이 거리에 나타나지 말라며 말입니다. 물론, 이렇게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행동하는 이들보다는 머리 속으로만 생각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겁니다. 하지만 심정적으로는 이준석과 그 패거리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023년을 보내고 2024년을 살고 있는 제가 보기에는, 그 현장에서 아무 말 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을 느끼며 담벼락에라도 침을 뱉고 욕을 던지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가늠하기 어렵지만서도 '소돔과 고모라의 몇 안 남은 의인' 정도로 줄어드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앞섭니다.
* 여기서 짚고 넘어갈 한 가지. 흔히 사용하는 합리적이라는 말을 때로는 조심해서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항상 생각합니다. 혹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인데 왜 저들은 저렇게 판단할까?'라는 의문을 가져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이때는 합리적이라는 말을 '(타인의 손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한다는 의미의) 이기주의에 부합한다'라고 바꿔서 생각해 보세요. 꽤 들어맞을 겁니다. 고전파와 그 추종자들의 경제학에서 가정하는 합리적 선택을 하는 경제주체는 바로 이러한 가정에 충실한 자입니다.
정치는 공기와 같다는 말도 여기저기서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어느새 시나브로 스며들어 물들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겠지요. 참사 유가족의 단식투쟁 현장 건너편에서 피자와 치킨을 처먹고, '빨갱이는 죽여도 돼'라는 피켓을 들어보이고, 3월 1일에 일본 국기를 걸어두는 자들이 창궐하고, 이제는 이재명 대표에 대한 살인미수 정치테러까지. 당시 집권세력을 보면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집권세력은 과연 어디이고 누구일까요? 그들은 상대를 가르고 서로 싸우게 합니다. 시선을 돌리고서는 정작 유한한, 어쩌면 희소한 사회의 자원을 독식하려 하지요. 그리고는 욕망을 자극합니다. '배를 더 불려줄게', '부동산값 올려줄게'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여기에 호응하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어 자신의 주권을 그들에게 위임합니다. 그들은 위임받은 권한의 범위를 넘어 스스로가 권력의 주체로 존재하며 주권자를 발 밑에 두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일부는 뒤늦은 후회를 하기도 하지요. 속았다면서. ('나도 너도 모두 다 속았다'는 식으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들, 많이 보셨죠? 양두구육 세일즈에 대한 사과는 못할 망정 즙짜기 신공을 펼쳐보이는 꼬락서니. 이쯤 되면 입에 넣자마자 물려 뱉어버릴 클리셰 아닐까요?)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겹겹이 쌓아가는, 씨줄과 날줄을 한땀한땀 엮어내는 사유의 과정'이 생략된' 것을 넘어 그 사유의 과정'을 생략한' 채 스스로의 이익에 반하는 무언가를, 누군가를 배척하려고 하는 내면의 욕망이 그 출발점일까요? 참으로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과연 어느 정도 고민하고 배워야 이러한 자들의 꾐에 속아넘어가지 않을 수 있을까 고민해볼 일입니다. 그와중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이미 알고 있는 것, 깨닫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다가 무지(無知)와 무식(無識)에 관한 전우용 선생의 글이 떠올랐습니다. 지(知)와 식(識)에 대한 정의에 무릎을 탁 치며 공감했고, 그때문에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원문은 여기를 클릭
불 끄는 게 무엇보다 급한 일이라는 건, 따로 배우지 않아도 압니다. 배워야 아는 게 식(識), 배우지 않아도 아는 게 지(知)입니다. 그래서 배우지 못해 모르는 '무식'은 죄가 아니지만, 배우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걸 모르는 '무지'는 죄입니다. 흉악범더러 '무식'하다고 하지 않고 '무지막지'하다고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중략)
나라의 비상사태보다 자기 개인이나 집단의 관심사를 더 중시하는 게 '사익지상주의'입니다. '사익지상주의'는, 언제나 '반(反)공공의 무지'를 낳습니다. 우리 사회의 급한 불은, 저 끔찍한 '사익지상주의'와 그 정치적 대변자들입니다.
특정 이익집단이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여 선동하고 추종자는 스스로 사유할 능력과 의지를 점점 잃게 되지요. 그리하여 첫머리에 언급한 악의 평범성은, 스스로 사유할 능력과 의지를 잃어버린 자가 결국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타인을 배척하도록 하여 특정 이익집단을 위한 악의 도구로써 기능하는 것을 뛰어넘어 결국 스스로가 악인이 되어가는 일련의 과정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릅니다.
3. 그래서 다시 - 권력, 그리고 저항
여기까지 와서 대한민국헌법을 떠올립니다.
제1조 제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지난 2회에 걸친 권력 강의는 권력의 본질과 속성에 관하여 살펴보는 시간으로 다가왔습니다. 강의 전에도 그리고 마지막 회차를 앞둔 지금도 저는 위 조항을 계속 읊어보고 있습니다. 과문한 제가 찾아보기로는, '권력'이 등장하는 조문은 여기 말고는 없었습니다. 국민이 권력의 발원지이자 주체이고 국가기관과 공무원은, 대리인은, 위임받은 권한을 행사해야 할 뿐인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이는 탓에 우리의 기대수명은 점점 짧아지고 있을 겁니다.
"SO WHAT?"
이렇게 묻고 나몰라라 휙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여기 모인 해시민 해원은 모두가 궁금해하고 있을 거예요. 매우 구체적이어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인, 혹은 매우 추상적이어서 공허한 어떤 방안이 제시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어보고 있습니다. 내일 강의에서 말이지요.
다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권력을 가지고 있다. 대리인에게 이를 위임함에 있어 우리 모두가 지분이 있다는 뜻입니다. 대리인이 주권자인 국민의 뜻에 반하는 행위를 한다면, 우리는 그 위임을 철회하여야 합니다. 이는 헌법과 법률에 따라 행사될 수도 있고, 그 외의 방법을 통해서도 행사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저항권입니다. 어쩌면 이를 행사하는 때가, 안타깝게도 혹은 다행이도, 오긴 올 것 같다는 예상과 바람과 느낌적인 느낌이 있습니다. 저만 이렇게 생각하는 건 아닐 겁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내일, 강의실에서 뵙겠습니다 😊
1. 나의 인식 너머 어딘가 - 공감
저는 비행기를 타고 나가본 적이 아직까지 없지만, 외국에 가면 우리나라에서보다 장애인을 훨씬 많이 그리고 더 자주 마주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도움을 주는(시혜적 관점)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나와 대등한 너, 그리고 우리'로서,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대한다는 이야기도 종종 듣게 됩니다. 왜 그러할까 생각해 보다가 우연히 『장애시민 불복종』을 쓴 인권활동가인 변재원 작가의 글을 읽었습니다. 생각해 보자면 '장애인의 이동권'을 이야기하는 정도에서 그칠 것이 아니더군요. 아차 싶은 생각과 함께 조금 더 깊게 생각해보지 못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됩니다.
변재원 - 접근권과 자기 존중 (경향신문 오피니언, 2022.08.02.) 원문은 여기를 클릭
여기서 또다른 글을 소개합니다. 일전에 하워드 진의 책 『달리는 열차 위에 중립은 없다』와 관련하여 소개한 민중의소리 이완배 기자의 또다른 기사입니다. 참고로, 아래의 기사와 팟캐스트 김용민브리핑에서 진행했던 <경제의 속살>의 내용을 토대로 쓴 기자의 책 『경제의 속살 (총4권)』도 일독을 권합니다. 비전공자에게도 매우 친절합니다. 경제학을 전공한 전 국회의원 유승민이 '따뜻한 보수'라는 말로 한때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요. '차디찬 주류경제학'을 지지하는 이가 '따뜻한 보수'라는 말을 하니 이러한 모순이 또 있나 싶었습니다. 이 네 권의 책은 주류경제학에 반기를 든 행동경제학을 필두로 '진정 따뜻한 경제학'이 무엇인지를 아주 쉽게 풀어내는데, 다 읽고 나면 '뜨거운 진보'가 말하는 경제학이 무엇인지 피부로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민중의소리 이완배 - [연재] 추석 연휴에 만나는 진보경제학자들의 꿈 ⑤ 공감은 길러지는 게 아니라 무뎌지는 것이다 _ 프란스 드 발 원문은 여기를 클릭
변재원 작가와 이완배 기자의 글을 뒤섞어 생각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른 존재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이를 스스로에게 대입하여 생각하는 공감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어떠한 이유에서든 그 능력이 점점 사라질 수 있습니다. 이를 잊지 말고, 단순히 나보다 처지가 나쁜 이들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표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동등한 지위를 가지는 시민으로 더불어 살아감이 바람직하겠습니다. 개별 주체가 이러한 마음으로 타인을 대하는 것과 별개로, 공동체가, 사회가, 이 나라가 그러한 체계를 구축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누군가가 헌법이, 그리고 각종 법률이 보장하는 권리를 행사함에 있어 어떠한 이유로 '접근이 제한'된다면(여기에는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도 포함됩니다) 그 사람은 이 사회에서 존재가치를 잃어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나에게는 가능한 무언가가 불가능한(disabled) 누군가'를 '도와주는' 정도로 생각하는 것을 뛰어넘을 수 있겠느냐를 고민하는 것이 필요함에도, 그렇지 않은 자들이 현실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할 때 지독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제가 그렇지 않은 자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2. 생각의 타래 - 악, 게으름, 무식과 무지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은 '(그저 평범하게 보이는,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군중 속 일부에 불과한) 인간에게도 내면화된 악이 있을 것이다'는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였는데요. 제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평범함이 ordinary가 아니라 banality라는 것을 알고, 이건 또 뭔가 싶어 자료를 찾아보며 고민해 보니 지적 게으름이 가져온 부패 또는 타락에 가까운 의미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유의 깊이가 보잘 것 없기에 제가 잘못 이해했을지도 모르지만, 나의 앎에 의구심을 가지게 된 것만으로도 얻어가는 것이 있는 거라고 믿어보려 합니다. (네, 저는 아직 갈 길이 한참 멀어 보입니다.)
이 글을 쓰는 건, 해시칼리지 자유게시판에 있는 Eustochia님의 글을 보고 이준석과 그 패거리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원문은 여기를 클릭
장애인의 이동권에 관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집회·시위와 관련하여 이준석과 그 패거리는 '시민의 불편을 초래한다' 내지 '시위의 방식이 너무 진부하면서 과격하다'라는 이유를 내세워 혐오의 언어로 일방을 규정하고서는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게 할 요량으로 그들을 배제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서울시장 오세훈도 그 지분이 상당하겠습니다.)
이준석과 그 패거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는 있습니다. 사회 어디에나 일정 수준의 선을 넘는 자들은 으레 존재하기 마련이니까요. 다만 수면 위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인데. 여기에서 제가 앞서 언급한 '악의 평범성'이 '현상(phenomenon)'으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몇몇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더 많이 취하기 위해 또는 자신의 불편을 줄이기 위해* 이준석과 그 패거리의 주장을 깊은 사유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는 출퇴근길에서 집회·시위를 하는 장애인을 밀어냅니다. 면전에 대놓고 욕을 하기도 하지요. 당신들은 사회의 암적인 존재이니 이 거리에 나타나지 말라며 말입니다. 물론, 이렇게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행동하는 이들보다는 머리 속으로만 생각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겁니다. 하지만 심정적으로는 이준석과 그 패거리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023년을 보내고 2024년을 살고 있는 제가 보기에는, 그 현장에서 아무 말 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을 느끼며 담벼락에라도 침을 뱉고 욕을 던지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가늠하기 어렵지만서도 '소돔과 고모라의 몇 안 남은 의인' 정도로 줄어드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앞섭니다.
* 여기서 짚고 넘어갈 한 가지. 흔히 사용하는 합리적이라는 말을 때로는 조심해서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항상 생각합니다. 혹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인데 왜 저들은 저렇게 판단할까?'라는 의문을 가져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이때는 합리적이라는 말을 '(타인의 손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한다는 의미의) 이기주의에 부합한다'라고 바꿔서 생각해 보세요. 꽤 들어맞을 겁니다. 고전파와 그 추종자들의 경제학에서 가정하는 합리적 선택을 하는 경제주체는 바로 이러한 가정에 충실한 자입니다.
정치는 공기와 같다는 말도 여기저기서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어느새 시나브로 스며들어 물들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겠지요. 참사 유가족의 단식투쟁 현장 건너편에서 피자와 치킨을 처먹고, '빨갱이는 죽여도 돼'라는 피켓을 들어보이고, 3월 1일에 일본 국기를 걸어두는 자들이 창궐하고, 이제는 이재명 대표에 대한 살인미수 정치테러까지. 당시 집권세력을 보면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집권세력은 과연 어디이고 누구일까요? 그들은 상대를 가르고 서로 싸우게 합니다. 시선을 돌리고서는 정작 유한한, 어쩌면 희소한 사회의 자원을 독식하려 하지요. 그리고는 욕망을 자극합니다. '배를 더 불려줄게', '부동산값 올려줄게'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여기에 호응하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어 자신의 주권을 그들에게 위임합니다. 그들은 위임받은 권한의 범위를 넘어 스스로가 권력의 주체로 존재하며 주권자를 발 밑에 두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일부는 뒤늦은 후회를 하기도 하지요. 속았다면서. ('나도 너도 모두 다 속았다'는 식으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들, 많이 보셨죠? 양두구육 세일즈에 대한 사과는 못할 망정 즙짜기 신공을 펼쳐보이는 꼬락서니. 이쯤 되면 입에 넣자마자 물려 뱉어버릴 클리셰 아닐까요?)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겹겹이 쌓아가는, 씨줄과 날줄을 한땀한땀 엮어내는 사유의 과정'이 생략된' 것을 넘어 그 사유의 과정'을 생략한' 채 스스로의 이익에 반하는 무언가를, 누군가를 배척하려고 하는 내면의 욕망이 그 출발점일까요? 참으로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과연 어느 정도 고민하고 배워야 이러한 자들의 꾐에 속아넘어가지 않을 수 있을까 고민해볼 일입니다. 그와중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이미 알고 있는 것, 깨닫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다가 무지(無知)와 무식(無識)에 관한 전우용 선생의 글이 떠올랐습니다. 지(知)와 식(識)에 대한 정의에 무릎을 탁 치며 공감했고, 그때문에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원문은 여기를 클릭
특정 이익집단이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여 선동하고 추종자는 스스로 사유할 능력과 의지를 점점 잃게 되지요. 그리하여 첫머리에 언급한 악의 평범성은, 스스로 사유할 능력과 의지를 잃어버린 자가 결국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타인을 배척하도록 하여 특정 이익집단을 위한 악의 도구로써 기능하는 것을 뛰어넘어 결국 스스로가 악인이 되어가는 일련의 과정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릅니다.
3. 그래서 다시 - 권력, 그리고 저항
여기까지 와서 대한민국헌법을 떠올립니다.
지난 2회에 걸친 권력 강의는 권력의 본질과 속성에 관하여 살펴보는 시간으로 다가왔습니다. 강의 전에도 그리고 마지막 회차를 앞둔 지금도 저는 위 조항을 계속 읊어보고 있습니다. 과문한 제가 찾아보기로는, '권력'이 등장하는 조문은 여기 말고는 없었습니다. 국민이 권력의 발원지이자 주체이고 국가기관과 공무원은, 대리인은, 위임받은 권한을 행사해야 할 뿐인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이는 탓에 우리의 기대수명은 점점 짧아지고 있을 겁니다.
"SO WHAT?"
이렇게 묻고 나몰라라 휙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여기 모인 해시민 해원은 모두가 궁금해하고 있을 거예요. 매우 구체적이어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인, 혹은 매우 추상적이어서 공허한 어떤 방안이 제시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어보고 있습니다. 내일 강의에서 말이지요.
다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권력을 가지고 있다. 대리인에게 이를 위임함에 있어 우리 모두가 지분이 있다는 뜻입니다. 대리인이 주권자인 국민의 뜻에 반하는 행위를 한다면, 우리는 그 위임을 철회하여야 합니다. 이는 헌법과 법률에 따라 행사될 수도 있고, 그 외의 방법을 통해서도 행사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저항권입니다. 어쩌면 이를 행사하는 때가, 안타깝게도 혹은 다행이도, 오긴 올 것 같다는 예상과 바람과 느낌적인 느낌이 있습니다. 저만 이렇게 생각하는 건 아닐 겁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내일, 강의실에서 뵙겠습니다 😊